(1) 삶이라는 건 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이야기니까.
(2) 그럴 때 우리가 놀라는 것은 일기의 내용이 아니라 시간 때문일 겁니다. 마치 수령이 몇백 년에 이르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섰을 때나, 시간의 침식 작용으로 이뤄진 절벽 같은 것을 바라볼 때 느끼믄 기분과 흡사한 것이죠. 오랫동안 한자리에 쌓여온 시간에 감탄하는 것. 그 시간을 볼 수 있도록 남겨둔 한 사람의 성실함에 감탄하는 것. 일기의 대단한 점은 아무래도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하루치는 시시하지만 1년이 되면 귀해지는 것.
(3) 오늘은 정말 별 볼 일 없는 하루였다, 아무 날도 아니었다, 그렇게 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럼 오늘 내가 걸은 걸음과 내가 한 말들과 내가 본 풍경은 뭐가 되는 걸까요. 시간을 어째서 그리도 쉽게 지워버리고 마는 걸까요.
(4)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는 걸. 같은 계절, 같은 날짜이지만 오늘은 분명 작년 오늘과도 다르다는 걸.
(5) 기쁘고 즐거웠던 마음만 기억하고 그렇지 않은 마음은 덮어버리려 하는 것, 밀어서 뒤로 치워버리는 것, 그것이야 말로 반쪽만 사는 삶일 테니까요.
(6) 왜 나는 남에게 하는 만큼도 나에게 잘해주지 못하는 걸까?
(7)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순간 내 마음에 일어난 변화는 나밖에 모르는 거예요. 서운했는지, 화가 났는지, 억울했는지, 서글퍼졌는지, 실망스러웠는지, 창피했는지, 그 감정을 알아채야 하는 사람도 돌봐야 하는 사람도 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대신해줄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니까요.
(8) 매일 쓰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훗날 돌아볼 기록이 과거를 반성하게 해주어서가 아니라 현재에서 나와 마주 앉는 시간을 꾸준히 보내기 때문일 거예요.
(9) 여태 쓸 줄 모르던 마음을, 쓰지 못하던 마음을 어느 날 갑자기 잘 쓰게 되진 않는 것이다.
(10) 생각보다 좋았던 일도 많았다는 것을요. 이 순간들을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한 해의 끝에 무사히 다다랐다는 사실을요.
(11) 갑자기 좋아진 것도 아니고 예전부터 좋아하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적어두는 것만으로, 그 순간들은 제 인생에서 좀 더 선명해졌어요.
(12) 이 무용해 보이는 기록의 목적은 하나뿐입니다. 언젠가 이런 풍경을 바라보며 살았다는 걸 기억하고 싶어서예요. 시간은 많은 것을 빛바래게 할 것이고 10년, 20년이 지나면 지금 이곳에서의 날들은 희미한 추억으로만 남겠죠. 그때 그 집에 살았던 것 참 좋았지, 창밖 풍경이 근사했지, 하고요.
(13) 먼 미래의 내가 좋아하리란 걸 분명히 알아서, 미리 선물을 고르는 마음으로 창밖의 풍경을 기록합니다.
(14) 혼자라면 닿지 못했을 생각이 있죠.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만 생기는 추억도 있고요.
(15) 언젠가 그리워질 공간을 기록하기.
(16) 언젠가 울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아주 슬퍼지지는 않도록.
(17) 어떤 글은 쓰고 난 뒤 깨닫기도 합니다. 그랬구나.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구나.
(18) 당신이 아무리 스스로에게 너그럽고 관대해져도 당신은 여전히 노력할 것이고 여전히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천성이 그렇습니다. (허지원,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재인용)
(19) 좋은 줄을 모르고, 이 세상에 자신이 만들어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고 혼자서 지쳐버리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 그래서 여기 이런 마음이 있다고, 방금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세상에 자꾸 말의 형태로 꺼내놓습니다. 말한 저도 잊고 들은 상대도 잊을지 몰라도, 그 순간에 말은 거기 존재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문득 지쳐 있던 한 사람을 기운 나게 할 수 있겠죠. 제가 딛고 일어섰던 많은 말들 처럼요.
(20) 웃지 못하는 건 대체로 지금의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에요.
(21)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로 이 재앙을 닮아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재인용)
(22) - 부모와 '진짜 대화는 못 나누는 사람들
밥 먹었냐, 밥 먹었다 하는 것 말고, 퇴근하냐, 퇴근하고 있다 하는 것 말고. 진짜 얘기. 오늘 누구한테도 못한 그런 얘기. 그 결핍이 진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평생을 헤매게 하는지도.
(23) 우리 마음은 아주 나빠지지는 않을 거예요.
(24) 그러고 있으면 먼 미래에서 다 울고 난 얼굴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보입니다. 나는 두 개의 인생을 살 뻔했다고. 할머니의 영상을 남겨둔 인생과 남겨두지 않은 인생. 엄마 아빠의 바지런한 하루를 찍어둔 인생과 찍어두지 못한 인생.
(25) 지금 내 곁에서 생생히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모습, 언젠가 사무치게 그리워질 모습을요.
(26) 누가 그카드노. 팔자는 바로 해도 팔자, 거꾸로 해도 팔자라고. 내 팔자려니 하고 마음을 비우고 베풀민서 살아.
(27) 멀리서 늘 걱정하고 신경써준 사람이 있었다는 걸. 내내 사랑을 적어 보내준 사람이 있다는 걸. (...) 그러니 삶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누가 뭐라고 날 선 소리를 하더라도, 사람들이 다 등을 돌리더라도, 그것만 기억한다면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28) 한동안 저는 그 일기장을 필사적으로 피해다녔습니다. 그건 일상의 기록이 아니라 나약함으 ㅣ기록이었으니까요! 평생을 변치 않는 나의 '작심삼일력'과 나약한 의지와 끊기 없음을 그토록 생생하게 증언하는 기록이 있다니.
(29) 우리가 태어나 지금껏 사는 동안, 같은 날씨는, 같은 하루는 한 번도 없었어요.
김신지, 기록하기로 했습니다.